* 인보 힐링 놀이터/그리움 하나
뜨락에 스며드는 그리움
삶의 또 다른 여유를 찾아서...
(2011.11.28 월요일 안개가 자욱한 날)
언젠가 옆집에 살고 있던 무속인 할머니께서
"자네는 항상 바빠야 하고 많은 군중들 속에서 살아야 할 팔자"라고 하셨던
그 말씀이 씨가 되었는지
난 지금껏 그렇게 살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8남매 중 맏딸로 태어나서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청렴결백과 인정 많으시고
오지랍 넓으신 아버지의 천성 때문에
우리 8남매를 키우기에 어머니의 고생은
어쩜 배가되어 당연히 따를 수 밖에 없는 당연지사 였는지도 모른다.
맏딸인 내게도 그 영향으로 아르바이트를 했었고,
장학금을 받으면서 최선을 다 했지만
동생들을 위해서 배움의 아쉬움을 여고시절로 접어야 했었다.
그리고 난 오로지 동생들 교육을 위해 결혼일랑 하지않을 결심으로
남자들에겐 아예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지금은 절절한 미안함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그리움으로,
정서가 잘 맞을 것 같은,
가끔씩 아쉬움속에 서성이는 사람이 있을 듯 하지만...
그러나 그땐 제대복 한 벌 달랑 입고 나온 염치투성이 총각의 애절한 메달림을
끝내 뿌리치지 못하고 결혼할 수 밖에 없었다.
헌데 쓸데없는 욕심까지 많은 짝궁은 4남 3녀를 고집하면서 7남매의 이름까지 지어 놓았다.
난 독자로 태어난 짝궁의 외로움을 십분 이해하고 2남 3녀 오남매를 키웠다.
아들 둘은 생후 2개월 전후에 파상풍등으로 잃었기 때문에 결국 7자녀를 낳은 셈이다.
짝궁도 생활력은 강해서 빈틈없이 열심이는 살았지만,
다혈질이었고, 나완 성격, 취미, 식성등 1%도 맞는 게 없었고
시어머니, 시누이들 넷의 치닥거리까지...
지금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대견스러 울 만큼 우여곡절의 삶의 파도를 잘도 헤치면서 살아 왔었다.
가끔씩 "죽을 시간이 없어서 살고 있다."던
옛 어른들의 말씀을 실감하면서...
새벽 4시면 일어나 종종거리면서 다섯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시중들기에 힘겨웠고,
온종일 슈퍼마켓에 메달려 살면서,
서글픈 모습으로 마지막 지고 있는 꽃무릇의 숨결처럼
그렇게 시들거리면서 습관처럼 하루 하루를 마지못해 살아 왔었다.
허지만 세월은 어김없이 흐르고 사정없이 달려서
어느새 큰딸 <진>인 같은 과선배랑 결혼해서 딸, 아들 둘을 낳아서 행복하게 살고 있고,
고등학생이 된 자식들은 착하고 공부 잘 하는 복까지 받았고,
큰 사윈 S엔지니어링에서 수석 상무 이사로 회사의 중추적인 인물로 신임을 받고 있단다.
둘째딸 <선>인 형제 자매 많음에 질렸는지 하나만 잘 기르겠다고 딸 하나만 키우면서
지금도 아가씨처럼 예쁘고 멋스럽게 잘 살고 있으며
작은 사윈 S대기업 연구실에서 근무하다 밴처기업에 스카웃 되어 미국 잡지에 실릴 정도로
실력을 인정 받고 있단다.
세째인 큰아들 <원>인 미국 일리노이 대학에서 공학박사(건축) 학위를 받은 후
호주 시드니 뉴 사우즈 웨일즈대학 교수로 3년째 근무중이며,
아들, 딸까지 낳았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그래서 나도 호주는 5번이나 다녀왔었다. 지상 천국의 나라로 안주 하고픈 나라였다.
네째인 딸 <미>인 쏠로를 선언하고 에니메이션 후리렌서로 자유스런 행복을 주장 하며
나름 당당하게 살고 있으나 가끔씩 아빠의 시달림을 당하고 있다.
다섯째인 막내 아들 <필>인 치과 의사인데 역시 막내 딸처럼 자유선언 중이며
C 보건소에서 공무원으로 근무 하면서 여유롭게 살고 있으니 남들은 무척 부러워 하지만
아빠껜 끊임없이 며느리감 대려오라는 시달림을 당하고 있다.
자식들이 어느새 이렇게 훌적 자라서 제 몫을 다 하고 있으니
난 이젠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고, 남들의 선망의 대상까지 되는 위치에서
생전 고생을 모르고 살아 온 사람 같다는 착각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젠 조금 느슨 해진 여유로움에 영영 자신을 잃어 버리고 살 번 했었던,
내 작은 삶의 여유를 찾아,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순수 미술학부 한국화 공부에 발을 적셨었다.
어디선가 나를 위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축복을 온 몸에 느끼면서...
60세에 시험장에 들어섰을 때 면접 교수님께서 "왜 이제야 공부를 시작하십니까?" 물으셨다.
'자식들 다섯을 키우고 났더니 이제야 차례가 왔습니다.'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웃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과 주임교수님 이셨다.
나의 또 다른 삶의 새로운 시작에 설레임과 두려움도 많았었다.
최고령인 나는 교양수업에 들어 갔더니 교수님으로 착각하고 학생들이
인사를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늘 앞 좌석에서 열심이 필기하는 내게 노트를 빌려가는 학생들이 시험 점수를 잘 받았다고
음료수를 사 들고 기다리는 예쁜 학생들도 있었다.
난 20대 새내기들과 어울리기 위해 함께 김밥덩이를 입에 물고
넓은 교정을 쉴 새 없이 뛰어 다녔었다.
난 내 나이일랑 까맣게 지우고, 나를 버리고 오로지 후배로서 선배에게 대한 예의를 다 했었고,
깍듯이 경어를 쓰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지체없이 다 해 주었다.
그 결과 다행히 고맙게도 과 학생들은 잘 따르고 진심으로 도와 주었다
그리고 이건 정말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니 꿈도 꿀 수 없었는데
계속 4.5점 만점에서 4.2이상의 성적으로 계속 장학금을 받았고,
4.26의 학점으로 조기 졸업까지 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짝궁의 배려와 자식들의 절대적인 응원속에서 완전히 나이를 잊었던,
내 일생 중 가장 순수하게 행복 했었던,
자신도 몰랐던 새로운 내 적성을 맘껏 발휘할 수 있었던,
대학원의 공부까지 맛 보았던, 정말로 새로운 벅찬 삶이었다.
드디어 5개의 초대작가 꿈까지 이루어지고 ...
이제 국전작가의 꿈이 바로 눈앞에 있으니 더 바랄게 뭐 있으랴!
그래도 내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영원히 젊어지는 것이다." <에컬리스>
언제부터인가 위의 글귀가 내 삶의 에너지가 되었다.
난 그야말로 새로운 또 다른 삶의 여유를 즐기면서
오늘도 이렇게 붓을 들고 행복이 넘치는 미소를 지어본다.
조금이라도 더 괜찮은 詩. 書. 畵의 화가가 되기 위해서...
댓글 18
인보 12.10.03. 14:34
소중한 댓글들을 모두 날려 버렸습니다.어떻게 찾아오죠() 내게 용기 100배 주었던 그 보석 같았던 글발들을...
제 글은 매일 그러하니 지겹겠네요.히히